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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 아우구스투스

by CACACA 2024. 7. 16.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이끈 황제, 아우구스투스. 그는 공화정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제정 로마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오랜 내전 끝에 권력을 잡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고, 후에 '로마의 아버지'라 칭송받게 되었죠. 이번 글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아우구스투스의 등장

공화정 말기 로마의 위기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대내적으로는 귀족층과 평민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죠.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공화정의 권위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한편 로마의 지배층은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를 비롯한 군벌들은 무력을 앞세워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공화정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탄생과 성장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로마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죠. 그의 증조부는 노예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정계에 진출해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옥타비우스는 총명함과 진취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눈에 들어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로마 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발판이 되었죠.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양자가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죠. 이제 겨우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명성을 등에 업고 정계에 나섰습니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치밀한 계산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다졌고, 또 한편으로는 정적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형성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죠.

악티움 해전과 로마의 지배자가 된 옥타비아누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숙적 안토니우스와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것이죠. 안토니우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로마는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됩니다. 레피두스는 이미 제거되었고, 이제 그의 앞길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었죠.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원로원에서의 'Augustus'라는 칭호 부여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Augustus'라는 존칭을 부여합니다. '존엄한 자' 혹은 '신성한 자'를 뜻하는 이 호칭은 이후 로마의 황제를 지칭하는 공식적인 칭호가 되었죠.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혹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로 불리게 됩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는 외견상으로는 공화정의 지도자를 자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한편, 제국의 번영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죠. 그의 통치 기간은 로마가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 시대로 불립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의 업적

속주 재편과 제국의 확장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영토를 정비하고 확장하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불안정했던 속주들을 재편하고, 제국의 통치력을 강화했죠. 특히 이베리아, 갈리아, 소아시아 등지에서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펼쳤습니다.

한편으로 아우구스투스는 현명하게도 무리한 정복은 자제했습니다. 게르만족에 대한 정복이 실패로 돌아가자, 라인강을 제국의 북부 국경으로 삼았죠. 또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영토 확장보다는 외교적 해결에 주력했습니다.

제국 행정 조직의 정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오래된 관습들을 정비하고, 제국 차원의 행정 조직을 갖추는데 힘썼습니다. 우선 그는 원로원을 개편해 황제에 충성하는 세력으로 만들었죠. 또한 기사 계급을 제국 관료로 적극 등용해 행정력을 높였습니다.

도로, 수도교, 항만 등 제국의 기반 시설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유명한 아피아 가도가 로마에서 남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죠. 속주와 중심부를 잇는 교통로가 확충되면서 제국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종교 정책과 제국 이데올로기 확립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통합을 위해 종교 정책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로마 건국 신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정립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죠. 유피테르나 마르스 등 전통적인 로마 신들에 대한 제의도 활성화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통치가 신의 섭리임을 강조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로마인의 신성한 기원과 운명을 노래함으로써, 제국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했죠. 이처럼 그는 종교와 문화를 통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의 한계와 유산

평화와 번영의 이면

로마의 평화로 불리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어두운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그의 집권 과정 자체가 수많은 정적의 피로 물들어 있었죠. 공화정 옹호자들에 대한 탄압도 가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속주민들의 입장에서 로마의 지배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기도 했습니다. 가혹한 세금 징수와 경제적 수탈에 시달려야 했죠. 이런 모순은 후대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후계자 승계와 그 한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황권을 안정적으로 세습시키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원로원과의 합의에 따라, 그는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의 정치가로 남고자 했죠. 이런 이유로 후계자 지명 문제는 항상 아우구스투스가 껄끄러워하는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들 두 명을 잇달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모두 요절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계자 티베리우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유산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사에 남긴 유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끈 결정적인 인물이었죠. 제국 시대 로마의 기본적인 통치 구조와 이념적 토대를 마련한 것도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약 200년 동안 로마는 내우외환 없이 안정을 구가합니다. 5현제라 불리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들의 현명한 통치가 이어졌죠. 이들이 다스리던 2세기는 로마 제국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론

이상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정의 기틀을 마련한 그는 로마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분이라 할 수 있겠죠.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평민에서 신이 된 인간. 그의 생애는 격동의 로마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를 형성했습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 그것은 제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영광의 한 페이지였죠.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가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공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분분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역사를 연 위대한 업적만큼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로마 제국의 지평을 연 청년. 혼란과 내전의 시대에 제국에 질서와 평화를 되찾아준 영웅. 아우구스투스는 바로 이런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마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