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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로마 제국의 몰락, 동서로 갈라진 두 제국

by CACACA 2024. 7. 18.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고대가 저물고 중세의 막이 열렸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지만, 결국 로마의 영광은 동서로 갈라진 두 제국으로 분열되고 말았죠. 이번 글에서는 로마가 쇠퇴하며 분열되어가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제국 쇠퇴의 원인

내부의 타락과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

세베루스 이후 로마는 50년간의 혼란기를 겪습니다. 이 시기에는 무려 26명의 황제가 잇달아 즉위했는데, 대부분이 군부의 지지로 황제가 된 이들이었죠.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제국의 정치는 극도로 불안정해졌습니다.

특히 내부의 부패와 타락이 만연해졌는데요. 호화로운 궁정 생활과 사치가 흥청망청 퍼지고, 정실 인사가 극심해지면서 제국의 기강은 무너져갔습니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속주의 반란과 외침의 위협도 거세졌죠.

기독교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기독교 문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전통적으로 다신교를 신봉했는데, 단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용납하기 어려웠죠. 네로 시대 이래 단속과 탄압이 이어졌고, 기독교도들은 수없이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3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상황이 반전됩니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니케아 공의회로 정통 교리도 확립되었죠. 이는 중세 서유럽 문명의 토대가 되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게르만족의 이동

서로마 말기에는 외침의 위협도 극심해졌는데요. 특히 게르만족의 남하는 서로마 멸망의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서기 410년, 알라리크이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 城을 약탈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훈족의 침입을 피해 남하한 게르만족들은 로마군을 압도했습니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계 장군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하고 말았죠.

동서로마의 분열과 대립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

동서로마 분열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324년,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 수도로 삼고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명명했죠. 이는 로마에 맞먹는 부와 권력의 중심이 동쪽에 또 하나 생겼음을 뜻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입지는 전략적으로도 탁월했는데요. 육로와 해로가 교차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요충지였죠. 방어도 수월해서 훗날 오스만 제국의 공격도 수 세기동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동서로마의 긴장과 대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동서로마의 대립을 낳았습니다. 특히 불가리아와 발칸 지역을 두고 양측의 갈등이 첨예했죠. 또한 종교적으로도 차이가 있었는데요. 서로마가 가톨릭을, 동로마는 그리스정교를 신봉하면서 알력이 생겨났습니다.

동서로마 분열의 결정적 계기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유언이었습니다. 395년, 황제는 동생 아르카디우스에게 동로마를, 아들 호노리우스에게 서로마를 맡기면서 사실상 제국을 양분했죠. 이것이 훗날 동서교회의 분열로까지 이어지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으로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

서로마가 476년 멸망한 후,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비잔티움은 4-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구가했는데요.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반포되었고,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표되는 건축의 황금기도 열렸죠.

하지만 7세기 이후 비잔티움도 이슬람 세력에 밀리며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며 국력이 소진되었고,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비잔티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게르만족의 국가들과 중세 서유럽 세계

서유럽의 혼란과 봉건제의 성립

서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은 크나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게르만족의 여러 국가들이 할거했고, 이슬람 세력의 공격도 거셌죠. 이런 와중에 크고 작은 영주와 기사들이 각자의 영역을 다스리는 봉건제 사회가 자리잡혔습니다.

봉건제 하에서 영주와 기사, 농노의 신분이 고착화되었죠. 계급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고, 영주들은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렸습니다. 세습제의 후견-봉신 관계는 중세 서유럽 사회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크리스트교 문명의 형성

한편 가톨릭과 크리스트교 문화는 중세를 관통하는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크리스트교 사상을 확산시켰고, 라틴어가 교회와 학문의 언어로 자리잡았죠. 중세 문예 부흥을 이끈 스콜라 철학도 가톨릭 신학을 바탕으로 꽃피웠죠.

십자군 전쟁 역시 크리스트교 문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096년부터 200여 년간 8차례나 일어난 십자군은, 이교도 이슬람에 맞선 '성전'을 내세운 것이었죠. 결과적으로는 동방 무역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크 왕국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

게르만족 국가 중 가장 번성한 것은 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클로비스에서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기까지 프랑크 왕국은 중세 초 서유럽 세계의 패권이었죠. 특히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 서로마 황제의 관을 쓰며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분열되는데요. 동프랑크는 962년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선포하며 독일로 이어집니다. 서프랑크는 훗날 프랑스의 전신이 되었죠.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대립은 중세 후기까지 서유럽의 역학 구도를 규정하게 됩니다.

결론

로마 제국의 분열과 멸망은 인류사의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고대 지중해 문명의 절정이었던 로마가 쇠퇴하면서, 서유럽은 중세라는 새 시대로 접어들었죠. 그리스-로마 문명의 단절은 어두운 암흑기로 이어졌지만, 게르만족의 새 국가들과 크리스트교 문화는 중세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로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비잔티움 제국에 이어진 동로마의 전통은 16세기 오스만 제국까지 살아남았고, 로마법과 라틴어는 오늘날에도 서양 문명의 뿌리로 자리잡고 있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 이후 세계 질서의 근본적인 재편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이는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를 거쳐 근대 유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의 시발점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과 몰락은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역사의 대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