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사후, 로마 제국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티베리우스에서 세베루스에 이르는 약 2세기 동안 로마는 절정과 쇠퇴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현명한 황제들의 시대가 있었던 반면, 폭군의 횡포로 신음하던 시기도 있었죠. 이번 글에서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제국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군주들
티베리우스, 능력있지만 인색했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계자 티베리우스는 뛰어난 행정가였지만, 인색하고 음울한 성격으로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는데요.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했고, 게르마니쿠스의 승리로 제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다만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전제 군주적 색채가 짙어졌고, 진시황적 행태로 로마 귀족들의 반감을 샀죠. 결국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은거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광기의 폭군들, 칼리굴라와 네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는 로마가 배출한 최악의 폭군 중 한 명이었습니다. 말 인시타투스를 황제로 삼으려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죠. 칼리굴라는 과도한 사치와 폭정으로 로마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근위대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네로 또한 폭군으로 악명 높았죠.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하고, 첫 번째 박해를 감행한 황제로 기억됩니다. 네로는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 자신의 황금궁을 짓느라 백성들을 혹사시켰고, 이는 네로 말기의 내란으로 이어집니다.
현명한 군주 클라우디우스의 통치
칼리굴라와 네로 사이,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는 그나마 선정의 기간이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제국의 통합에 힘썼죠. 또한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공공사업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통치에도 그림자는 있었습니다. 황후 메살리나의 음모와 근위대의 전횡이 심해졌고, 제국의 기강은 무너져갔죠. 이는 네로 시대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내전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등장
네로 사후의 내란과 베스파시아누스의 등극
네로가 자결한 후, 로마에서는 내전이 발발합니다. 빈데크스의 반란과 키루기투스에서의 전투를 거치며 말이죠. 결국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사태는 진정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속주의 로마화를 진행했고, 콜로세움 건설을 시작하는 등 경제발전에 힘썼죠.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도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의 쾌거였습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과 티투스의 업적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짧은 재위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황제로 평가받습니다. 재위 1년차에 발생한 폼페이 화산 폭발은 로마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요. 티투스는 신속히 구호에 나서고 피해 복구에 힘썼습니다.
또한 티투스는 콜로세움을 완공해 개막했고, 시민들을 위한 온천도 건설했습니다. 아쉽게도 티투스는 재위 2년만에 역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죠.
폭군 도미티아누스와 플라비우스 왕조의 멸망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의 동생이자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습니다. 치세 초반에는 선정을 펼쳤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전제적인 면모를 드러냈죠.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는데요. 행정과 군사 면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지만, 전제적이고 잔혹한 성격으로 인해 악명 높은 폭군으로도 꼽힙니다. 결국 황후와 근위대장의 음모로 시해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막을 내립니다.
五賢帝 시대와 로마의 전성기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제국의 전성기를 연 군주들
도미티아누스 사후, 로마는 현명한 황제들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바로 5현제라 불리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네르바는 짧은 재위에도 불구하고 폭정의 잔재를 청산하고 로마에 안정을 되찾아 주었죠. 그가 양자로 삼은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 최대의 영토 확장을 이룬 영웅으로 칭송받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와 제국의 번영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그는 예술을 사랑했고,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들을 아끼고 보살폈죠. 팬테온 신전을 비롯해 하드리아누스가 남긴 건축물들은 제국이 누리던 평화와 번영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는 개혁에도 힘썼는데요. 속주 경영 시스템을 개선하고 법률을 정비하는 등 제국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사후 제국의 위기
5현제의 막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자 황제'로 유명합니다. 스토아 철학을 신봉한 그의 저서 <명상록>은 인류의 고전으로 꼽히죠. 아우렐리우스 치세에도 제국은 안정을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코모두스는 폭정을 일삼으며 제국을 내리막길로 이끌었죠. 이는 후대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됩니다.
북아프리카 출신 황제 세베루스의 등장
세베루스의 군인 황제 시대 개막
페르티낙스 황제의 암살로 촉발된 내전 끝에, 아프리카 출신의 장군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릅니다. 그는 군인 황제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데요. 세베루스는 군부의 비중을 대폭 높이고, 친위대의 권한을 강화했습니다.
세베루스 역시 업적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동방의 파르티아를 견제하고 불라 펠릭스와 같은 대규모 건축을 진행하는 등 제국의 부강을 이루어냈죠. 반면 잔혹한 성격으로 정적을 탄압한 폭군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카라칼라의 폭정과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
세베루스의 맏아들 카라칼라는 잔혹한 황제로 악명 높습니다.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정적들을 처형한 일화는 유명하죠. 카라칼라는 법률로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실상은 과세 수입을 늘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카라칼라를 끝으로 세베루스 왕조도 막을 내립니다. 이후 로마는 50년에 걸친 군인 황제 시대의 대혼란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결론
지금까지 티베리우스에서 세베루스에 이르는 로마 제국사를 되짚어 보았습니다. 제국의 절정과 위기가 교차하던 격동의 2세기였죠. 현명한 황제들의 치세에서, 우리는 고전 문명의 최고봉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 폭군들의 전제 통치는 제국 쇠퇴의 씨앗이 되기도 했죠.
물론 로마 제국의 역사는 이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세베루스 이후에도 로마는 수차례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법률과 사상, 예술과 문화는 인류의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로마 제국이 남긴 유산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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